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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설

0: 프롤로그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겉모습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나약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제발, 이번만은 봐주세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정부도 그 아이를 막지 못했는데...... 그 아이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우리 국가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행복하고 평화롭지 않다는 걸, 그 애는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지금 애쉬에게는 제가 필요해요. 엄마가 있어줘야 한다고요. 제가 아니라 제발 애쉬를 위해서 이번만 넘어가-"

그녀는 하던 말을 마저 끝내지 못했다. 재판장은 쥐 죽은 듯이, 아니 사람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1: 애쉬, 3024년

 

"진 은 2691에 세워진 국가입니다. 혼란스럽고 오염된 지구의 일부만을 살려서 3019년인 지금까지 버틴 강력한 국가를 세웠습니다......"

"진에서는 최고의 교육환경을 자랑합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견딜 수 있는, 그럼 아이들을 양성하죠. 이 아이들은 자라서 진을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키울 것입니다. 저희의 교육 시스템은 크게 6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진의 교육 시스템은 건국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럼록 박사님이 개발하셨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완벽한 럼록 박사님의 이론은 크게 6가지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먼저, ……"

 

스크립트의 마지막 문단을 읽는 나의 목소리는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이 짓을 하고 있게 된 걸까. 더 이상 여기 있을 수가 없었다. 돌아오라고 소리치는 방송부원들을 제치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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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그날처럼, 난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눈을 떠보니 나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벽에 서 있었다. 절벽의 끝자락에 가서 서자, 파도끼리 부딪히면서 생성된 차갑고 얼음 같은 물방울들이 내 얼굴을 때렸다. 마치 날 채찍으로 후려치는 듯 했다.

어떤 시련이 와도 견딜 수 있는 아이들을... 다시 스크립트의 내용을 떠올리자 눈물이 비 오듯 흘렸다. 너무나도 미안했다. 엄마에게, 캐시에게, 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나는 살릴 수 있었지만, 나는 살리지 못했다. 아니, 살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비겁한 겁쟁이처럼.

 

 

 

 

 

 

 

 

 

 

 

 

2: 애쉬, 20년 전

 

이름: 애슐리 버사 클림트

 

생년월일: 2999년 1월 4일

키: 167

몸무게: 47

‘아니야. 내가 47kg 라니.’ 입력한 몸무게가 너무 거짓말 같아서 숫자 7을 지우고 그 대신에 숫자 9를 입력했다. 내 실제 몸무게인 50이라고 입력하기에는 너무 민망했다.

‘내가 이 사이트에 가입하는데 왜 굳이 몸무게와 같은 세부적인 정보까지 입력을 해야 하지? 

순간적으로 확 짜증이 났다. 그래도 이건 정상적인 진의 청소년이면 당연히 가입해야 하는 곳이다. ‘틴즈 크레이지 월드’ 라는 이 사이트는 실시간으로 최근 사건들을 올려준다. 누가 누구랑 사귀거나 헤어졌는지, 누가 어젯밤에 어디서 누구와 함께 파티를 열었고 또 언제 열 것인지, ** 선생님의 모든 비밀, 요즘 유행하는 옷이나 문구 등 정말 다양한 정보가 나와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이 모두 안전하고 건전한 정보들은 아니지만 말이다. 은근히 쓸데없는 이야기나 누군가를 은밀하게 디스하는 글 가끔 나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비스 약관에 모두 동의를 하고, 가입하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안녕하세요, 애쉬님. TCW 에 오신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라는 문구가 떴다. 가입한 김에 사이를 전체적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 오늘은 별다른 뉴스가 없는 듯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고, 천년 전 영화에서 나온 토니 스타크처럼 손 바닥을 위 아래로 포개면서 에어스크린을 껐다.

그리고는 화장실로 직행을 했다. 물론 화장품이 들어있는 나의 명품 AVA 가방을 들고 가는 것 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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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애쉬고, 15살이다. 진의 12개의 학교 중 가장 좋은 이비스에 다니고 있다. 얼굴은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 머리카락만큼은 자랑할 만 하다. 고운 적갈색인데다가 곱슬 이라서 어깨 위를 파도처럼 흘러내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염색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 머리카락은 이랬다. 아무튼, 나는 살면서 머리 색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델링 업계를 담당하시는 분이 나를 보았고, 나는 그때부터 모델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이는 7살이었다. 비록 어리지만 예쁜 옷은 물론 마스카라, 립스틱, 하이힐까지 어른들이 하는 걸 난 어린 나이에서부터 접해왔었고, 그래서 그런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아무데도 못나간다. 화장한 내 얼굴을 하도 많이 봐서 생 얼은 너무나도 못생겨 보인다. 물론 지금은 학업에 신경을 쓰느라 더 이상 모델링 관두었지만 말이다. 

오늘의 잔소리는 화장 때문이었다. 사실은 일주일 내내 잔소리의 화제가 화장 이었다. 전에는 화장을 아주 진하게 해도 아무 말도 안 하던 엄마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엄마의 이유 없는 잔소리를 그냥 받아들였다. 잔소리를 듣는 것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잔소리는 그냥 일상생활의 일부였다.

 

 

나는 평생 잔소리만 듣고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잔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자란 것 같다. 심지어 2살 때의 잔소리도 기억이 난다. 원래 인간은 5살 이전의 기억은 잘 안 난다고 하는데 그 일의 임팩트가 커서 그런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가족이 나의 2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곧 촛불을 불 시간이 되었다. 너무 설레고 급한 나머지 팔로 케이크를 탁! 치고 말았다. 무슨 케익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케익은 완전히 뭉그러졌고 접시는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폭발하셨다. 그 내용은 가물가물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생일파티가 선물 없이 끝났다는 것이다'.

 

  내가 잠시 과거 속에 갇혀있는 동안 엄마는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제는 모델링 안 하는데 왜 또 화장질 이야? 애슐리, 내가 어른 돼서 하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니? 당장 지워!"

평소에는 참는 내 성격이지만 오늘은 폭발을 하고 말았다.

"내가 화장을 하던 말던 엄마가 뭔 상관이야? 내가 1시간이 걸려, 2시간이 걸려? 15분이면 되잖아! 내가 피부관리를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진짜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엄마도 덩달아서 언성을 높였다.

"어머, 이게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너 이제부터 화장 금지야. 이리 내! 으휴,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못살아. " 이 말과 함께 엄마는 보물과 같은 내 화장품 가방을 낙아 채셨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화장 금지라니. 어의가 없었다.

"에이 씨, 왜 알지도 못하면서 맨날 나한테 잔소리야! 나 때문에 못살아? 그럼 내가 없으면 되겠네!"

방으로 뛰어가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서 엄마한테 건방지게 구느냐는 소리가 저 멀리에서 어렴풋이 들렸다. 교복, 티셔츠, 후드티, 간식......모두 캐리어 안으로 쏟아 부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엄마를 힘차게 밀치면서 나는 현관을 나갔다.

 

 

 

 

 

 

 

 

 

 

3: 애쉬, 가출

 

 

괜히 왜 나오는 지도 모르는 뜨거운 눈물을 차가운 바람과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뛰었다. 여기저기에서 비행중인 볼타루스들이 뒤집히고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그냥 뛰었다. 뛰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았다. 어떻게 사람들과 장애물들을 피해갔는지는, 미스터리다. 차라리 그때 지나가던 RnR벨리크롤에 치이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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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다 지쳐 눈을 떠보니 마야의 집 앞이었다. 마야와 나는 어릴 적 절친이다. 하지만 내가 모델링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만남은 점점 뜸해졌고, 이제는 서로 인사도 하지 않는, 남과 다를 게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그걸 아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모델 계에서 만난 애들과 친해지라고 하셨다.

 

그런 내가 왜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애가 지금 날 본다면 뭐라고 할까? ‘누를까 말까’ 초인종 앞에서 망설이면서 나는 마야의 집 앞에서 한참 동안 서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마야가 창문으로 나를 보고 나더러 안 춥냐고
, 쫄딱 젖었는데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열어 들어오라는 듯이 손을 까닥였다. 나는 어떨 결에 마야를 따라 들어갔다.

 

 

 

 

 

 

 

 

 

 

 

 

 

 

 

 

4: 애쉬, 마야네 집

 

"잠깐 앉아있어. 내가 핫초코 해줄게."

 

마야는 날 반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야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내가 지금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마야는 "나 화 안 났어." 라고 말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야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을뿐더러, 표현을 하더라도, 화났다, 안 화났다 로 표현을 하곤 했다. 화가 안 났다는 건 좋은 의미였다. 적어도, 우리가 멀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 마셔."

마야가 따뜻한 머그잔을 내주었다. 하얀 김이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약간 멈칫하자 마야는 "나 화 안났는데두......" 라고 하면서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나도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핫초코를 한 입 마셨다. 진하면서도 커피처럼 약간 썼다.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그 애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위로 스윽, 올라갔다. 핫초코를 한 입 더 마셨다.

"가출한 거야?"

마야가 정적을 깼다.

나는 머그잔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맛있는 핫초코를 마시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야가 다시 물어왔다.

"뭐 때문에?"

"잔소리."

마야의 눈이 커졌다.

"너도 잔소리 들어?"

풋! 하고 웃음이 나오면서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마야는 삐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뭐가 그렇게 웃긴데?"

"당연히 잔소리 듣지, 그럼 안 듣냐?"

"아니, 너네 엄마 완전 착하시잖아. 들어봤자 얼마나 듣겠어."

"웃기시네. 남 앞에서만 그렇게 하는 거야. 나한테는 얼마나 잔소리하고 소리지르시는데. 착한 건 너희 엄마고. 맨날 너한테 맛있는 거 사주시고, 원하는 옷도 사주시고 하시잖아."

이번엔 마야가 웃었다.

"저기요,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희 엄마는 맨날 그런 것 만 사주지, 절~때 저한테 칭찬 같은 건 안 하시거든요?"

언제 멀어졌냐는 듯이 우리는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이 정도로 행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때, 현관문에서 띠리리리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마야의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마야, 공부 안하고 뭐해. 너 수학숙제는 다 했어?"

이말을 하시면서 마야의 엄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캐리어는 못 본 듯 했다.

"어어, 애쉬니?"

 

나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놓고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방해되신다면 지금 갈게요."

"아니야 아니야. 오랜만에 왔는데 좀 더 놀다가."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놀아!"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마야의 엄마는 마야에게 '너 나중에 보자. 죽을 줄 알아.' 라는 눈빛을 보냈다. 순간적으로 나는 데자뷔를 느꼈다.

 

"마야,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 눈빛. 두 눈을 꼭 감아도 계속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2살때, 케이크가 망가졌을 때 잔소리한 엄마의 금색 눈빛과 똑같았다. 그냥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히 똑같았다. 마야 엄마의 눈 색깔은 검은색이고 우리 엄마는 옅은 갈색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 큼에는 마야 엄마와 내 엄마의 눈빛이 같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둘의 눈은 금색으로 변했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정신 차려 애쉬! 그저 네가 상상한 것뿐이야!’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거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초대는 왜 한 거야?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놀지만 말고 제발 공부 좀 해라 공부!"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마야가 이번만 봐달라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냐고, 말했다. 내가 이유 없이 찾아 온 건데, 마야는 그런 날 보호해주고 있었다.

"변명하지마! 내가 전에도 수십 번 얘기 했잖아, 계랑 놀지 말라고. 이게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몇 년만 더 있으면 너희는 친했던 안 친했던 경쟁자가 될 거야. 괜히 상처받지 말고 지금 당장 인연을 끊으란 말이야. 지금부터 1시간 줄게. 어떻게든 해결해." 이말 안에는 ‘해결하지 않으면 너는 큰일날 거야.’ 라는 지가 담겨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들은 척 다시 마야의 방으로 들어갔다. 핫초코는 반도 못 마신 채로 식어버려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마야와 아직 친할 때, 엄마가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떻게 기억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마야엄마가 한 말과 완전히 겹쳤다.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말이다. 금색 눈빛, 같은 말. 순간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지만 곧바로 난 그 생각을 버렸다.

5분 정도가 지나자 마야가 들어왔다. 눈시울이 붉어져있었다.

“저기 애쉬, 내가 할 말이 좀 있어. 우리 있잖아……”

갑자기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야,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나 다시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진짜로 미안해."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집으로 뛰어갔다. 캐리어를 두고 왔다는 건 집에 도착해서야 겨우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캐리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다.

 

 

 

 

 

 

 

 

 

 

 

 

 

 

 

 

 

 

 

 

 

 

5: 애쉬, 엄마의 다이어리

 

있을 거야, 어딘가에는 있을 거야.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온 나는 엄마가 잠깐 외출한 틈을 타서 엄마 방 안의 모든 서랍들을 뒤지는 중이었다. 내가 찾는 것은 엄마의 다이어리였다.

 

마야랑 멀어지기 대략 3주전부터, 엄마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자녀교육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원래는 자녀가 8살이 되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지만 당시에 내가 해외에서 모델링을 하는 중이라 학교를 잠깐 휴학 중이고, 엄마는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 필수로 들어야 하는 이 교육을 1년 연기해 준 것이다. 엄마는 이 교육을 내가 18살, 즉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들어야 한다.

 

 엄마가 자녀교육에서 첫 번째로 배운 것, 아니 지시 받은 것은 내 아이의 일상을 기록하는 다이어리를 쓰는 것이었다. 다이어리를 쓰면서 아이의 성장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또한 자신의 감정을 성찰할 수 있다 라는 이유에서다. 정말 말도 안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다이어리는 엄마라는 CCTV 를 통하여 우리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내가 지금 그 다이어리를 찾는 이유는 잔소리 때문이었다. 엄마가 지금까지 제대로, 성실하게 써왔다면, 조금 전의 금색 눈과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은 잔소리의 미스터리를 풀 단서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쯤에 있을지, 과연 엄마가 자녀교육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써왔을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옷장에서 나오지 않자 화장대를 뒤졌고, 그 다음에는 모든 서랍을 뒤졌다. 심지어 배게 밑과 매트리스의 안쪽까지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다이어리는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려는 순간, 부엌에서 인공지능이 전자레인지가 뭘 완료 했다고 말했다. 엄마가 뭔가를 넣어놓고선 그냥 나가신 모양이다. 난 한숨을 쉬면서 부엌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레인지 앞에 서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안에는 소독한 손수건이 있었다. 뜨거워진 손수건을 양손 사이로 주고 받으면서 거실에 있는 빨래대로 가서 손수건을 쫙 펴서 널었다. 식탁에는 조그마한 종이 하나가 자주색 노트 위에 부착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손을 대자 엄마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엄마가 남긴 음성 노트 메세지에는 협박이 담겨있었다.

애슐리, 엄마 잠깐 마트갔어. 네가 이걸 읽을지, 안 읽을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집에 언제 오건, 들어올 때는 아주 혼날 줄 알아. 네 화장품은 내가 다 갖다 버렸어. 다시 갖고 싶으면 네 돈으로 다시 사던가, 알아서 해. 이미 늦었으니까. 너 집에 들어올 거면 맞을 각오까지 하고 들어와. 넌 아주 죽었어.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엄마가 내 화장품을 돌려주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을 화장품을 통째로 버렸다니! 더 웃긴 거는 나에게 알아서 하라는 말이었다. 도대체 알아서 하라는 건 무슨 말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아!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이럴 수가! 식탁에 세상 사람 다 보라고 놓여있는 그 자주색 노트가 엄마의 다이어리임이 틀림없었다!

 

아수라장이 된 엄마의 방은 언제 치우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곧바로 체, 어차피 엄마한테 혼나게 생겼는데 뭐. 로봇한테 해달라 해도 되고. 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나는 다이어리의 페이지들을 떨리는 손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2984년, 2월 7일

 

만약 내가 딱 한가지 소원을 빌 수가 있다면, 잔소리를 그만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난 애쉬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애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진의 모든 엄마들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원하는 만큼 사랑을 줄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고 있다.

 

2984년, 2월 10

가끔은 모든걸 포기하고 죽고 싶어질 때가 있다. 답답해서, 진실을 밝히고 싶어서. 하지만 나에게는 애쉬라는 진주 같은 존재가 있다. 애쉬를 처음 배정 받았을 때는 걱정이 되었다. 이 아이가 과연 건강하게 클 수 있을까, 혹시 내가 이 아이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여러 걱정에도 불구하고, 애쉬는 정말 예쁘게 잘 커주었다. 볼 때마다 너무 행복하고, 어떻게는 사랑을 표현해 주고 싶다. 물론 진의 교육부에서 제한한 정도로만 말이다. 비록 내 딸이지만, 내 마음대로 키울 수가 없다. 트리니티 가 우리 모두를 구속한다. 트리니티는 우리의 자유를 앗아갔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2984년, 2월 24

 유리디아가 독재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가장 강력하고, 스파이도 많다…… 음, 내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사형선고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에서 사형이 집행된 적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ACK 라는 방송국에서 세부정보처리요원으로 일을 한다. 매우 스트레스 받는 직업이다. 손가락 하나만 잘못 움직여도 현실이 왜곡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음, 현실이 왜곡되기보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게 날 것 같다. 진은 너무나도 많은 비밀들을 커튼 뒤에, 연극에 필요한 부품들처럼, 보이지 않게 꽁꽁 숨기고 있다. 나는 정보처리도 하지만 그 비밀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베일을 걷으면 이라는 파일명으로 크리에이터만 열수 있는 사이버 공간의 구석에 저장해 놓았다. 애쉬가 준비가 되면, 나는 이 파일을 보여줄 것이다. 이 파일이 애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다이어리를 덮었다. 이 다이어리는 자녀교육용 다이어리가 아니었다. 엄마의 개인적인 다이어리였다. 엄마의 몇 장 되지 않는 일기는 나의 의문문들을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질문을 더 만들어 냈다. 유리디아와 트리니티가 무엇인지, 자녀교육에서 뭘 가르치는지, 왜 진의 엄마들이 조종을 당하고 있는 건지. 겁이 나기도 했지만 나는 이 모든 것 들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 파일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찾아야 하지, ‘진짜로 진 에서 엄마가 하는 일을 알아내면 어떡하지 배정받았다는 건…….아닐 거야.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혼잡하게 만들었다. 두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엄마와의 일이 좀 풀린 후에 생각해봐야 하나…….

역시 그랬다. 일단은 정상적인 척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나는 엄마의 다이어리는 처음 상태와 똑같이 돌려놓고, 엄마의 방으로 돌아가서 바닥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흔적 없이 싹 치웠다. 그런 다음 내 방으로 가서 에어스크린을 켰다. 마야에게서 메세지 여럿 와 있었다.

- 너 도대체 어디간 거야? 캐리어도 두고 가고 말이야.

 

- 야, 대답 좀 해봐. 네 캐리어 어쩔 건데…… 가지러 올래?

- 애쉬, 왜 대답을 안 해? 무슨 일 있어???

- 야 애쉬! 애쉬!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교복이 든 내 캐리어를 어쩐담. 일단 답장부터 보냈다.

-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 캐리어는 내일 학교 가면서 찾으러 갈게. 오늘 진짜 고마웠어~^^

기다리고 있었는지 마야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 에이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참, 너 TCW 에 올라온 신글 봤어?

- 아니, 잠만.

인터넷 창을 클릭하고 TCW 에 접속했다. 곧바로 커다란 글씨로 제목이 떴다.

 

[잔소리 듣기 싫어] - 아이샤의 자살사건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샤는 우리 학교 아이다. 같은 반도 아니고 아직 학기 초여서 말을 건 적은 없지만 꽤 괜찮은 아이였던 걸로 기억을 한다. 항상 복도에서 친구들로 둘러싸여 재잘대며 수다를 떨던 애다. 그런데 자살을 했다니. 밑으로 스크롤을 해서 댓글을 읽었다. R.I.P 아이샤 와 같이 아이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이들의 댓글과 누가 잔소리 때문에 자살까지 하냐 는 비판적인 댓글이 마구잡이로 섞여있었다. 다시 기사로 눈을 돌렸다.

  이비스 스쿨의 한 학생이던 아이샤는 어제 오후 5시경에 근처 공원에서 자살을 한 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손에 밀리폰 2.0 모델 101을 쥐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엄마에게 보낸 문자에 있었습니다. 다 엄마 때문이야. 아이샤는 평소에……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마야에게 쪽지를 보냈다.

-방금 읽었어.

-너무 충격적인 것 같아. 아이샤 부모님은 어떡해 bb

-그러게……

- 그런데 어떻게 잔소리 때문에 자살을 하지?

- 잔소리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가정문제를 제외하고 말이야.

- 아무튼, 진짜 너무 충격이다. 난 아니타랑 아는 사이였는데. 뭐,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 아 진짜?

대화는 이런 식으로 계속 흘러갔다.

 

마야와 이렇게 SNS로 활발하게 소통하는 건 우리가 멀어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잔소리가 다시 한 번 언급되자, 순간적으로 마야에게 모든 일을 털어 놓고 싶었다. 금빛 눈, 엄마의 다이어리, 토씨 하나 틀지 않았던 말.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마야를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우리는, 예전의 절친이 아닌, 그냥 친구다. 아니, 아직 친구라고 하기도 조금 그렇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면 되지. 뇌가 속삭였다. 아니야. 이젠 너무 늦었어. 라고 받아 치면서도 가슴의 한 구석이 저려왔다. 나는 마야가 그리웠다. 내가 언제부터 마야를 이렇게 멀리하게 되었을까?

 다시 메세지 하나 들어왔다. 이번엔 마야가 아니라 잰더였다.

-애쉬, 안녕? 메시지 주고 받은 지 좀 오래 됐네? 이번 주말에 레오하고 브리짓이랑 만나서 숙제 하기로 한 거, 기억하지?

잰더는 내가 1년 전부터 짝사랑하던 애다. 마음이 따뜻하고, 항상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잰더가 난 정말 정말 좋았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도 했다. 음, 잘생기기보단 더 귀여운 편인 것 같다. 금발머리에 녹을 듯 말듯해 보이는, 초콜릿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항상 장난기가 넘치는 눈이다. 나는 웃으면서 답장을 해주었다.

-당연히 안 잊어버렸지. 내가 그런걸 잊어버릴 애는 아니잖니? ㅎㅎ

-뭐, 그건 그렇지 뭐, 넌 워낙 꼼꼼하니깐.

-^^;;

-참, 너 숙제 끝나고 같이 영화 보러 갈래?

숨이 멎었다. 설마. 조심스럽게, 내가 이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뻐한다는 게 티 나지 않게,  메시지를 보냈다.

-둘이서? 아님 누구??? 

-아아, 내 친구 잭슨이 마침 영화 티켓이 4개를 구해서, 데려오고 싶은 사람 한 명 고르라고 했어. 숙제도 같이하게 된 겸, 너랑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재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당연히 저는 YES 죠~~~ ;)

-오케이! 그럼 이번 주말, 숙제 끝나고 바로다! 잊어버리지마~^^

-난 그런거 안 잊어버린가니깐?! ︑︹︑

-앗, 내 실수!

-ㅎㅎㅎ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2

 

컴퓨터 전원을 끄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두 눈을 감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잰더랑 영화를 보러간다! 난 이번 주말에 잰더랑 영화를 보러간다! 난 이번 주말에 귀여운 잰더랑 같이 영화를 보러간다!!!

옆에 있는 곰 인형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 이번 주말에 좋아하는 애랑 영화 보러 간다. 좋겠지?

 

띠띠띠띠띠띠. 홍채 인식이 완료 되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런! 엄마가 돌아온 것이다! 인형을 제자리에 갔다 놓고, 재빨리 옷장에 숨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6. 마야, 애쉬가 떠난 뒤에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와서 언제 헤어졌냐는 듯이 수다를 떨다가 바람처럼 휙 가버렸다. 평소에 그렇게도 꼼꼼하던 애가 캐리어까지 두고 갔다. 물론, 내가 알고 있던 그 애의 성격이 지금의 성격과 일치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걔가 나를 보고 다시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아이의 눈은 겁먹은 듯 했다. 내가 잔소리를 듣건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 때문에 날 다시 버리고 간 걸까.

뭐, 이미 갔으니 아무리 고민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엄마에게 복수하는 것 이였다. 애쉬 앞에서는 더 있다 가라는 둥 정말 상냥하게 말해 놓고선 나에겐 빨리 보내라고 소리까지 질렀다. 애쉬가 못 들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크게 질렀다. 리고 나는 그 말에 또다시 복종 할 뻔했다.

 애쉬와 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절친이었다. 모든걸 같이했다. 그게 숙제가 됐건, 방과후가 됐건, 우리는 항상 함께했다. 심지어 유치원 때는 한 식 판에 밥을 받아서 같이 먹으려 한 적도 있다. 이것이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지만.

 

물론 이 모든 추억들은 우리가 아직 어리고 순수할 때였다. 하지만 애쉬가 모델링을 시작하자, 우리 둘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등 하교를 같이하지 않는 걸로 시작했고, 곧 서로의 집으로 놀러 가지도 않게 되었다. 나중에는 서로 본체만체를 할 정도로 멀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와 애쉬는 무너진 우리의 우정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와 애쉬가 노력하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엄마의 잘못이 가장 크다. 애쉬랑 멀어 진지 한두 달쯤 지나자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이제부터는 애쉬랑 놀지마."

엄마가 원래 이야기 하는 것처럼 살짝 돌려서 이야기하지도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놀지 말라고 했다. 내가 반박을 하자, 엄마는 "개는 네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라고 말했다.

강하게 부인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애쉬가 원하는 거면 별로 내키지 않더라도 항상 해줬다. 걔가 나를 억지로 끌고 다닌 건 아니지만 난 스스로 끌려 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크게 싸운 적이 없다. 애쉬가 모델링을 시작하자 나처럼 소심한 애 말고도 많은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묻혀버렸.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그런 생각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애쉬는 날 버리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 건 엄마였다.

모든 것이 엄마의 잘못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지금까지 걔가 날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고, 공부로 나를 채찍질했다. 덕분에 전교 10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성적이 나의 눈물과 외로움을 대신해줄 수는 없었다. 지난 6년동안 난 혼자였다. 친구도 없었고, 엄마는 그 어떤 위로도 해주지 않았다. 공부도 지긋지긋했다. 엄마는 100점이 아니면 다 실패한 거라고 했다. 그 놈의 실패 소리를 듣기 싫어서 난 죽도록 공부했고, 드디어 작년에 전교 1등을 찍었다. 그래도 엄마는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전국경시대회 같은 데를 나가라고 끊임없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수 차례 이야기 했는데도 말이다. 엄마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엄마가 엄마 같지가 않았다. 돌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그런데 이런 엄마의 욕심이 나의 친구관계까지 좌우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엄마가 매주 다니는 자녀교육에서 도대체 뭘 가르치길래 엄마가 나의 모든 선택을 대신 해주게 된 걸까.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만 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엄마한테 복수를 할 수 있을지, 나는 고민을 했다. 마침내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교과서, 노트, 문제집, 자습서, 참고서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의 옷장 서랍 속에 있던, 옛날에 사람들이 담배를 피던 시절에 쓰던, 불을 붙이는 용도로 길쭉하게 생긴 라이터라는 걸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7. 애쉬, 옷장 속에서

 

 애쉬? 

엄마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한 번 외출하면 저녁때 정도는 되야 들어오기 때문에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옷장의 맨 뒤쪽에 바짝 붙으면서 아까 들어올 때 신발을 신고 들어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러 개의 옷들 사이에서 숨을 죽였다.

 애쉬? 으휴, 내가 저 년을 못 말려 진짜. 하여튼 간 맨날 지 맘대로야 지 맘대로.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애쉬! 너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나와!

 응? 그걸 어떻게 알았지? 빨래대가 바닥에 덜그럭거리면서 나뒹구는 소리가 들리자, 속으로 아차 싶었다. 엄마의 다이어리를 찾다가 널어 놓은 손수건을 엄마가 본 것이다! 애쉬 이 바보 멍청이! 속으로 나 자신을 마구 욕했다.

 애쉬! 애쉬!

 엄마가 온 집안을 쿵쾅대는 소리가 들렸다. 옷장 속에 더 깊이 들어가서 두 눈을 꼭 감았다. C.S Lewis 의 마녀와 사자와 옷장이 생각났다. 책에서처럼 나니아로 가버리고 싶었다. 왜 이럴 때만 천 몇 백년 전 고전이 생각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 군데군데 둘러보더니 곧 나갔다. 안심하고 숨을 다시 쉬려는 순간, 쾅! 소리를 내면서 옷장 문이 열렸다. 수많은 옷들 속에서 나는 얼어 붙었다. 옷들 사이로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는 옷들을 몇 벌 꺼내다가 옷장 문을 닫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경직되었던 몸이 풀리면서 난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어떡하지? 엄마가 나가지 않고 계속 집에 있으면 어떡하지? 밥은 그냥 굶고 옷장에서 자야 하나?

 일단 만일을 대비해서 옷장 안을 편안하게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 사람이 3명 정도는 여유 있게 누울 수 있을 만큼 넓어서 자는 데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옷들이 이불과 배게 를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빛이었다. 옷장 안은 정말 어두컴컴했다. 혹시…… ?’

 젤다, 온. 허공에 대고 속삭이자, 옷장이 에어스크린의 희미한 불빛으로 가득 찼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젤다, 헤일리에게 페이스 콘택트 좀 해줘. 소리를 줄이고 에어스크린에게 명령을 내렸다. 헤일리는 우리 학교 학생들의 지갑을 자기 마음대로 쥐였다 폈다 할 수 있는 애였다.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은데 티켓이 없다면, 아이들은 헤일리를 찾아가서 티켓을 샀다. 물론 원래 티켓의 두배 가격으로 말이다. 한 남자애가 좋아하는 여자애와 우연히 마주쳐서 꼬시고 싶으면, 그 우연한 만남은 헤일리가 만들어 주었다. 당연히 돈을 받고 말이다. 헤일리는 모든걸 해결해 주는 사람이었고, 이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돈을 얼마나 요구할지는 몰랐지만, 일단 여기서 탈출하는 게 더 중요했다.

 네, 알겠습니다. 애쉬님.

 곧 헤일리의 얼굴이 옷장 벽에 나타났다. 내가 앉아있는 곳을 보자 헤일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애쉬? 도대체 거긴 어디야? 설마 옷장 안이야?

 나는 최대한 불쌍하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헤일리를 설득시키려면 굉장한 연기를 선보여야만 했다.

 맞아, 나 지금 옷장 안이야. 헤일리, 나 좀 도와줘, 부탁이야. 오늘 실수로 엄마가 가장 아끼는 세라믹 접시를 깨고 말았는데, 그걸 방금 엄마가 알아버렸어. 그래서 지금 옷장 안에 숨고 있는데, 나 좀 제발 꺼내줘. 여기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나의 연기가 더 실감나게끔 하려고 눈물까지 쥐어짰다. 헤일리는 고민하는 듯 했다. 

 제발, 제발, 제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헤일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SS 미드나이트 블루.

 뭐?

 네가 저번 달에 미카엘라의 댄스파티 때 입었던 그 드레스 말이야! 그걸 나에게 선물로 준다고 약속하면 꺼내줄게.

 아- 알았어.

 

나는 웃음을 꾹 참고 소중한 애완견이 죽었을 때 지을만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 SS 미드나이트 블룬지 뭔지가 나에게 정말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실 그 드레스는 파티 하루 전, 중고 매장에서 5비트를 주고 산 것이다. 다른 애들은 50 에서 70 비트씩 주고 매장에 가서 3시간씩 고르는 동안에, 나는 정말 단시간에 적은 돈을 내고 쇼핑을 마쳤다. 그런데 헤일리는 지금 그 5비트짜리 원피스를 탐내고 있었다. 5비트 치고는 꽤 예쁜 드레스긴 하지만 말이다.

 나의 약속을 받아내자, 헤일리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꼭이야! 내가 신호를 주면 창문으로 빠져나와!

 

 띠리리리, 띠리리리. 통화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발신자는 이비스스쿨의 교장입니다.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벌써? 라고 생각을 하는 동안, 엄마는 이미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연결해……. 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엄마는 가다듬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저어, 혹시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애쉬와 같은 학년인 아이가 자살을 했는데요, 애쉬에게 빌렸다가 미처 돌려주지 못한 물건들이 있더군요. 지금 전해드리고 싶은데, 너무 바쁘진 않으신지요?

 아니요 아니요. 지금 괜찮아요. 그럼 어디로 갈까요? 학교로 지금 찾아갈까요? 

 헤일리가 순간 당황한 듯 했다.

네?

지금 학교로 찾아가냐고요?”

아,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방금 드론이 문 앞에 놓았을 것 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나자, 엄마는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재빨리 옷장에서 나와 헤일리가 원하던 그 드레스를 챙겼다.

 어어? 왜 없지? 아직 안 왔나? 

 엄마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에 나는 이미 방을 탈출하고 창문을 잠그고 있었다. 일단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갈 곳이 필요했다. 다시 마야의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가지... 갈 곳은 한군데 밖에 없었다. 나는 반짝이로 코팅이 되어있는 나의  핑크 볼타루스에 올라탔다. 드레스는 내일 학교에서 줘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한숨을 쉬면서 인공지능에게 명령을 내렸다.

젤다, 나를 종이 도서관 101호점으로 데려다 줘.